*운동*을 생각한다.
Journalist : 지유철 | Date : 01/06/08 18:25 | view : 208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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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늘 자신을 들여다 보며 서럽게 울었읍니다.

표나지 않게 속으로 말입니다. 말을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을 들여다보며 울었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모습이 매우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현재의 나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서럽다'든지, '울었다'든지 하는 수사까지 동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도 자존심이 없지 않거든요. 문제는 내일이었습니다.



문뜩 멈추어 서서 잠시 고개를 돌려 내일을 보았습니다.

지금처럼 도전하지 않고, 하나의 일에 미치지 않고,

오히려 권위주의가 주는 달콤함을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한 모습으로 계속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상상해 본 것이지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2. 

제가 지휘자로 산정현 교회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999년 1월 3일이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운동은 제 삶으로 성큼 다가왔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 출근을 시작했고,

1년 12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운동을 하시는 담임 목사님을 곁에서 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분의 운동은 뛰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더워도 뛰었고, 추워도 뛰었습니다. 바빠도 뛰었고,

정해놓은 아침 시간을 놓치면 따로 시간을 내서 뛰었습니다.

처음엔 그토록 바쁜 분이 매일 운동을 거르지 않을 수 있다는,

(저로서는 매우 생소한) 사실 앞에서 놀랐습니다.

그 놀람은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뛰는 것은 단순히 운동이 주는 효과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데 생각의 선이 닿았기 때문입니다.



3. 

1999년 이후 저는 비로소 처음으로 생활 속에서

'운동'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생활 속으로 운동을 끌어들였습니다.

그것이 스스로 운동을 끌어들인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운동 속으로 밀쳐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기윤실의 출근이 그렇고, 매일 뛰는 분과

한 공동체 안에서 숨쉰다는 게 또한 그랬습니다.



1999년 이전의 저는 '건강' 내지 '운동'에 관한 한은

철저하게 플라톤의 제자였습니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사람의 모습이

좋게 보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특히 영적인 사역자들이 열심히 새벽기도와 운동을 병행하는 모습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가 너나할 것 없이 '건강'을 부르짖는다고

영적인 사람들까지 건강을 위해서 비지땀을 흘린다는 게

매우 어색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원론적 신앙의 잔재는 

영적인 기도와 육체의 건강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을

수용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지요.

때문에 저는 운동을 소 닭 보듯, 또는 코를 틀어막고 피해 달아나야 할 똥 보듯 했던 것입니다.

 

4. 

그러니까 결국 우리 담임 목사님은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을 통해서,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저 스스로가 운동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왜 운동을 하는 지, 그리고 운동을 통해서

우리 삶에 얻어지는 진정한 유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5. 

오늘의 내 삶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 앞에서

아마추어이고, 게으르고, 악한 모습으로 섰던 저 자신을 반성하면서

저는 운동을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분처럼 뛰는 것이 제가 기윤실에서 써야 할 

보고서와 전화 통화를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매달 써야하는 원고나 교회 일도 그러하지요.



만약 내일 당장 뜀박질을 시작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게으름 때문에 시간이 모자라서 헉헉대는 저로서는 보고서 작성하고 전화할 시간의 확보에 더 큰 구멍이 생길 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오늘은 웬일인지 눈물을 훔치며 운동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다시 시작하기 위해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기도나 더 철저한 묵상으로부터 시작할 게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세속적이기까지 한) 운동,

기술이 필요없는, 어떤 장소 어떤 제약 속에서도 시작할 수 있는

달리기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6. 

물론 이런 저의 생각이 일부 '홀리'한 분들에게는

지극히 세속적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삶이 무너졌을 때 기도하는 습관과 성경 읽는 습관을 회복 함으로

삶의 전체를 건강하게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정도이겠지요. 예외는 없을까요?



삶이 뒤틀리고 지쳤을 때, 사무실 책상을 정리하고, 휴지통을 비우고,

때려 쳤던 운동을 시작하는 매우 쉽고 일상적인 것의 회복을 통해

삶의 전 영역으로 나아갈 수는 없을까요?

아니 그런 작고 작은 '일'을 영적으로 회복해 가면서

기도와 묵상을 끌어들일 수는 없는 것일까요? 

 

7. 

우리 나이 44에 벌써 편안함에 길들여지려고 하는 오늘의 나를 보면서

저는 또 다시 김훈을 생각했습니다.

아니 김훈의 운동을 생각했습니다.

김훈의 운동을 통한 도전을 생각했습니다.

이제 지난 2년 여 동안 세미하지만 강력하게 도전해왔으나

그 때마다 외면했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이제 저도 운동을 해야 하겠습니다.  

 

8. 

작년 10월에 썼던 글을 꺼내 읽었습니다.

그리고 더듬거리면서 그 글을 쓰게 만든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꺼내 뒤적였습니다.

운동에, 도전 정신에 젖어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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